가난한 교회를 꿈꾸다
두봉 주교가 처음 밟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전쟁고아가 거리를 헤매고,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던 시절. 그러나 그는 폐허 속 절망이 아니라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사목 방향은 분명했다. 가난한 교회를 만드는 것. 그는 말로만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대전 성심당과 인연을 맺고 빵을 나누며 시작된 그의 선교는, 단순히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닌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농민의 곁을 지킨 인권의 수호자
1969년 안동교구가 설립되면서 초대 교구장이 된 그는 화려한 집무실이 아닌 거친 농촌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안동에서 그는 “외국인 신부는 그저
돕는 사람일 뿐”이라며 자신을 낮췄지만, 불의 앞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1979년 ‘오원춘 사건’ 당시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을 폭로하며 벌인 20일간의 단식 농성은 그가 얼마나 농민들을 위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뜨거운 증거였다.
농협 민주화와 부채 탕감 운동 등 농촌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중심에는 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안식처, 다미안 의원
가장 낮은 곳을 향한 그의 시선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머물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빠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다미안 피부과 의원’을 세웠다. 그는 질병의 고통뿐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싸워야 했던 이들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며, 정착촌 6곳을 설립해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결국 환자들을 다시 살게 만든 건, 차가운 의술이 아닌 그가 보여준 따뜻한 인류애였다.
교육과 문화로 지역의 미래를 열다
두봉 주교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길은 교육뿐이라고 믿었다. 상지여자중·고등학교와 현재의 가톨릭상지대학교를 설립해 농촌 지역 자녀들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종교와 상관없이 지역 주민들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안동문화회관’을 건립해 문화 시설이 전무했던 지역민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공간이 됐다. 그는 늘
“세상에 도움이 되는 교회”를 말했고, 교회는 실제로 지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두봉은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안동 사람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모든 것을 비워낸 뒤 찾아온 진정한 기쁨
그는 “현지인 신부들이 자립하면 물러나겠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90년 미련 없이 주교직에서 사임했다. 은퇴 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소박했다. 평생 모은 부모님의 유산과 만해대상 상금 3,000만 원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부했다.
한국인이 된 프랑스인
2025년 4월, 그는 사랑하는 한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사랑했고, 한국에서 늙었고, 한국에서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그가 남긴 말은 단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창한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스며든 온기를 남겼다.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고, 먼저 들어주고, 조용히 기도하며, 필요하면 자기 것을 내어주던 삶.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던 두견새는 이제 침묵 속으로 떠났지만, 그가 남긴 울림은 여전히 이 땅 곳곳에 번지고 있다. 잘 사세요. 기쁘게, 떳떳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