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명품 수선공의 명품 인생,
50년 밤낮 일해 모은 12억 전남대에 기부한 김병양(‘36)
김병양(‘36)

김병양(‘36)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에도 저를) 중학교는 꼭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에도 저를) 중학교는 꼭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평생 배움에 대한 한(恨)이 남았다는 김병양(84)씨는, 그러나 여느 지식인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울림을 남겼다. 지난 4월, 3평짜리 골방에서 50년 가까이 구두 수선공으로 밤낮 없이 일해 모은 현금과 주택 등 12억원 상당을 전남대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씨는 어려운 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 대신 돈 버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전남대(전신 도립농과대학 추정) 정문 앞 식용유 공장을 다녔어요. 일하다가 가끔 교정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요.” 어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는, 1960년대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몸 쓰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겨울엔 난로용 석유를, 여름엔 커다랗게 자른 얼음 덩어리를 날랐다고 한다. 그는 “(상경 초반엔) 남대문 시장에서 짐받이 자전거에 물건을 가득 싣고 명동 한복판을 내달렸다”며 “열심히 일한 덕에 통장에 돈이 제법 쌓였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던 1970년대 어느 날, 기름 배달하며 알게 된 ‘명동 스타사’ 수선 기사가 “주인이 건물을 내놨는데 인수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줬다고 한다. 이렇게 가게를 인수하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앞 귀퉁이에 자리한 하꼬방(판잣집)이었는데, 일이 많았어요. 뾰족 구두며 핸드백은 물론이고 가방, 구두를 수선해 달라는 남자 손님들도 많았지요.”

서울 멋쟁이들이 죄다 몰려들었던 명동 거리에서 꼼꼼한 김씨를 찾는 손님은 날로 늘었다. 손기술 좋은 김씨 부인도 큰 몫을 했다. 한창 ‘쓰리꾼(소매치기)’들이 활개칠 때 안쪽에 가죽을 덧대 감쪽같이 고쳐내곤 해 ‘쓰리 땜 아줌마’란 별칭까지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업을 이어가며, 한때 직원 숫자는 서른을 넘기기도 했다. 유명 백화점·대기업까지 김씨 가게를 찾아와 수선을 맡겼다고 한다. 가죽 염색약 냄새로 코가 얼얼할 정도인 날이 많았어도, 김씨는 묵묵히 이를 견뎌가며 손님들 가방이며 구두를 새 것처럼 고쳐냈다. 이렇게 ‘수입 명품 수선 전문점’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정작 본인은 평생 명품 하나 없이 검소했다. ‘명품도 즐겨 쓰느냐’는 언론 인터뷰 질문에서 김씨는 답했다. “에이, 우리 같은 사람한테 명품이 왜 필요하겠어요. 평생 하나도 안 샀습니다.” 김씨는 이처럼 검소하게 살며 50년 가까이 애써 모은 12억원 상당의 재산을 이번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6억원은 대학 측에 현금으로 이체했고, 시가 6억원 상당 연립주택도 사후(死後) 기부하기로 했다. “어렵게 공부하는 애들 주는 게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밝힌 기부 이유다. 김씨의 장학금을 건네 받은 대학 측이, 학생들에 남기는 당부의 말을 해달라고 했을 때 그의 답은 이랬다고 한다. “(당부 같은) 그런 거 없지요. 그저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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