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나 벌어 오라” 한마디에 훈춘서 위안부 생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사는 김군자 씨. 김 씨가 열일곱 살이 되던 1942년 3월, 수양아버지인 일본 순사는 “돈이나 벌어 오라”며 30대 남성의 손에 김 씨를 딸려 보냈다. 당시 위안부로 끌려가 매를 맞아 고막이 터진 뒤로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중국 지린성 훈춘으로 간 김 씨는 위안부 생활을 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고난의 세월 이겨내며 5천만 원 모아
3년 후 광복이 되어 38일을 내리 걸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김 씨를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김 씨는 가정부에서부터 미제물건 노점상, 화장품 판매상, 라면 장사까지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마음속에 분노가 끓어오를 때마다 불교, 천주교 등 각종 종교에 의지해 기도로 그 시간을 버텨냈다. 1998년, ‘나눔의 집’에 입주한 김 씨는 외출할 때 필요한 옷 한두 벌 외에는 거의 내복만 입고 지낼 정도로 절약정신이 투철하다. 그는 이렇게 검소한 생활로 자신이 평생 모은 돈과 정부에서 지급한 위안부 피해 보조금까지 모두 합쳐 5천만 원을 모았다.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희망 주는 ‘김군자 할머니 기금’
김 씨는 ‘나처럼 부모 없는 이들이 돈 없어 배우지 못 한 설움을 겪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2000년 8월, 전 재산 5천만 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맡겼다. 재단은 할머니의 기부금으로 ‘김군자 할머니 기금’을 설립하여 아동보호시설에서 퇴소해야 하는 18세 이상 청소년을 위해 사용했다. 이후로도 그는 정부지원금을 고스란히 모아 기금에 5천만 원을 추가로 내놓고, 2011년에는 나눔의 집을 방문한 신부에게 장학금 천만 원을 맡겼다. 그렇게 김 씨가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총 1억2천만 원 남짓이다.김 씨는 두 번에 걸친 고관절 수술 이후 보조기에 의지해 걷게 되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지만, 수술 전만 하더라도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피해 실태를 알리는 집회에 참여하고, 2007년 7월에는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피해에 대해 증언하여 ‘마이크 혼다’ 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도왔다.힘들어 하고 있는 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돕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는 김군자 할머니. 끔찍하고도 고달팠던 시절을 견뎌낸 그는 자신과 같이 힘든 이들에게 한과 땀이 어린 돈을 기부함으로써 ‘아픔’을 ‘나눔’으로 승화시켰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