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민훈장 동백장강원희

“하늘에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게 소명”

강원희

30년간 네팔 등 해외 오지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펼친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불쌍하게 생각해요. 한마디로 불쌍하단 표현밖에 뭐…”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강원희 씨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 ‘소명3’에서 네팔의 환자를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는지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다.그는 어려운 시절, 힘들게 의대를 졸업한 후 1970년 강원도 속초에서 개인병원을 열었다. 병원이 잘돼 평생 풍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1982년 병원을 접고 49세의 나이에 홀연히 해외 의료 봉사에 나섰다. 한국도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더 어렵고 힘든 나라 사람들을 돌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후 그는 3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의료봉사를 하며 저개발국가에 머물고 있다.

의료부터 새마을운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소명 다 해

처음 네팔에 도착했을 땐 말도 통하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다. 그래도 그는 진심을 다했다. 네팔 포카라 지역 병원에서 일할 땐 복막염에 걸린 노인을 수술하다 피가 모자라 자신의 팔에서 직접 피를 뽑았을 정도다.네팔에서 시작된 의료 봉사는 방글라데시로 이어졌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1987년 대홍수로 5만 명의 이재민이 나자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강 씨는 바로 홍수 피해지역으로 의료 가방을 챙겨 떠났다. 그는 방글라데시 통기 지역의 진료소에서 난민촌 어린이를 살리고, 이재민 긴급 수술에 나섰다. 지역 시민 활동가들과 함께 방글라데시개발협회(KADB)를 만들어 농업· 교육 분야 사업과 함께 새마을운동 사업까지 벌였다. 강 씨가 주도한 새마을운동 사업은 훗날 한국 정부와 NGO들이 해외 원조 사업을 펼치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자일수록 더 정성 기울여”

그의 의료 봉사는 어렵고 힘든 국가들에 차례로 이어졌다. 한 한국 기업이 스리랑카 현지에 의료·복지시설을 만들며 강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기꺼이 낯선 그곳을 찾았다. 또 우리 정부와 교회 지원으로 만든 에티오피아 MCM 병원의 초대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현재 그는 네팔로 돌아와 국제협력단(KOICA)의 도움을 받아 만든 ‘한국-네팔 친선병원’의 진료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봉사 30년 만에 첫 해외봉사지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 성의 없이 진찰하면 오지 환자들이라도 금방 알아챕니다. 의사는 빈부나 귀천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최선을 다해 진료해야 하지요. 가난하고 어려운 환자일수록 더 크게 감동하기 때문에 저는 더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강 씨는 지금도 네팔에서의 첫 마음을 기억하며 진료에 나서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