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57년째 헌신하고 있는
‘부산 사나이’ 독일인 신부
안톤 트라우너(92세) * 한국명 : 하 안토니오

안톤 트라우너(92세)
* 한국명 : 하 안토니오

1950년대 폐허가 된 한국 땅에 와서 빈민 구제 시작

독일인이지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신부가 있다. 1950년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 와서 빈민 구제 사업과 의료·교육 봉사에 한평생을 바친 ‘안톤 트라우너’이다. 90세를 넘긴 원로 신부지만, 그는 지금도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부산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에서 신학대학을 나온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전쟁 후의 한국은 위험한 곳”이라며 그를 말렸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으로 떠났다. 안톤 트라우너 신부가 한국행을 결심한 것은 광복 직후인 1946년부터 2년간 북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시바스 신부의 강론에서 큰 감동과 울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1958년 독일 북부 블라타마루항에서 일본행 화물선을 타고 7주간의 긴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한국전쟁 후 고아원, 실업학교 등 설립하며 자립 도와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부산 대청동 ‘중앙성당’에서 1년을 머문 후 1959년 부산 남구 ‘동항성당’으로 옮겨 신부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폐허가 된 부산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빈민 구제가 시급함을 느꼈다. 동항성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한 후, 가난과 배고픔에 지쳐있는 피란민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밀가루, 옷, 식량 등을 배급하였다. 그리고 미국, 영국, 독일에 물자를 원조해서 약, 옷, 밀가루 등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우선은 배고픔을 면해

야 주민들이 기운을 내어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빈민 구제를 위해 힘썼다. 그뿐만 아니라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당시 소아마비와 각종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7명을 데려와 함께 기거하였다. 그들 7명 중 2명은 오늘날까지 안톤 트라우너 신부의 곁에 머물고 있다.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빈민 구제와 함께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1965년 그와 뜻을 같이한 독일인 카를로슈미케와 함께 ‘한독여자실업학교(現 부산문화여고)’를 공동설립하였고, 재봉틀 10대로 60명에게 무료로 봉제기술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독여자실업학교는 1970년대에 전교생 2,000명이 되었고, 졸업생 중 매년 100여 명이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하였다.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의료 봉사에도 힘을 쏟아 1977년 김시복 목사와 봉생병원의 도움으로 ‘교회 조산원(개명: 교회의원)’을 개원하였다. 당시 교회 조산원은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를 함께 운영하였고, 이곳은 신부와 목사가 새로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위해 기도를 올려 축복하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멀리서도 산모들이 찾아왔다. 1993년 폐원할 때까지 교회 조산원은 26,000여 명의 출산을 도왔다.

이제는 한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 한평생 한국을 위해 헌신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1958년 한국 땅을 밟은 이래 부산에서만 57년째 살고 있다. 그야말로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을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해온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2011년 부산시로부터 ‘명예 시민’으로 위촉되어 진짜 부산 사람이 되었다.
누구보다 한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이 컸던 안톤 트라우너 신부는 1974년 제1회 평화통일 기원 미사를 시작으로 매년 5월 13일 임진각광장에서 평화통일 기원 기도 모임을 갖고 있다. 1964년에는 ‘푸른군대’ 한국본부를 창설하여 1968년 한국의 푸른군대 활동상황을 세계에 소개하였고, 경기도 파주 문산읍에 ‘평화의 성당’을 준공하기도 하였다.

교황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명예 고위 성직자(몬시뇰)’에 임명된 안톤 트라우너 신부. 누구보다 한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그의 고귀한 마음이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