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무총리표창김창열

하늘나라로 간 아들이 알려준 나눔의 기쁨

김창열

스물여섯 살. 군대에 다녀와 취업준비 중이던 대학생들이 갑작스레 김창열 씨 곁을 떠나던 때…. 아들의 나이는 스물여섯살이었다. 하숙집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지 하루 만에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망연자실한채 차린 빈소에서 김씨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친구들이 문상와서 우리 애가 그동안 어려운 친구들을 소리 없이 돕고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형편 어려운 친구들에게 밥을 사주고 책값을 몰래 보태주고,직접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자란 친구의 학비를 모아주기도 했다구요.”
김씨는 아들의 죽음 앞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앞만 보고 살아왔던 인생,아들은 함께 사는 거라며,이웃의 손을 잡아주라고 아버지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씨는 아내와 많은 의논 끝에 아들의 생명보험금으로 작게나마 무료급식소를 운영해보자는 결론을 냈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름을 딴 재성이네 나눔쉼터. 나누는 삶을 살다간 아들처럼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해보자는 생각으로 쉼터는 문을 열었다.
처음엔 밥을 못 먹는 노숙인들을 위해 연 무료 급식소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의 방문이 하나둘 늘어갔다. 하루 급식소 문을 닫으면 하루 끼니를 건너뛰어야 하는 이들을 배려하다보니 일주일에 하루를 계획했던 무료급식소 운영시간은 자꾸 늘어갔고, 김씨는 결국 생업인 야채가게를 접었다. 어느새 재성이네 나눔쉼터가 주 5일,하루 평균 80여 이웃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소중한 안식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료 급식소를 운영한지 4년, 급식소는 큰 난관에 봉착했다. 무료로 이용하던 경로당 건물이 시유지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맞게 된 것. 김씨는 짓무른 아내의 손을 바라보며 이만큼 했으니 여기서 그만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매일 따뜻한 밥을 찾아, 따뜻한 정을 찾아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을라 차마 그만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려운 급식소 사정에 보태라며 모아뒀던 쌈 짓돈을 들고 나오신 어르신들과 파 한 단, 시금 치 한 단씩을 몰래 놓고 가는 이웃들, 소리 없이 찾아와 설거지를 돕고 총총히 생계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의 뜻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김씨는 결국 충주시 충의동 재래시장 한켠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고, 알음알음 찾아 온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로 쉼터는 지켜질 수 있었다. 이제는 나눔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는, 지역 이웃 사랑의 아지트가 되었다.
“몇 년째 밥을 나누다보니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가족 같아요. 늘 오시던 분이 안보이면 걱정이 되죠. 그래서 오시던 어르신들이 안오시면 집에 가 확인하고와요. 자주오던 분이 며칠 안 보이다,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한동안 마음이 참 착잡하죠. 반면에 노숙인으로 지내다 재활해 적은 돈이라도 기부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분들을 보면 가슴 찡한 보람을 느껍니다.” 재성이네 나눔쉼터를 돕고 있는 이들은 기업도 단체도 아니다. 김씨와 뜻을 같이하며 단돈 만원, 이만원씩을 기부하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눔쉼터를 돕는 숨은 지원자들이다. 김씨는 급 식소를 운영하는 틈틈이 주변의 재활용 옷을 모아 깨끗이 세탁하고 수선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무료급식 노인들에게 이미용과 목욕 봉사를 하고 있다.
“이 일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저분들이 밥 한 끼 드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마냥 즐겁구요. 세상 사람들이 나만 생각하니까 삶이 팍팍하고 힘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가진 것이 적어도 이웃과나누며 살다보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절로드는게 세상이니까요.” 봉사하는 삶을 택해 걸어온 지난 6년, 김창열 씨는 오늘도 어려운 이들의 마음과 몸을 덥혀줄 한끼 밥과 찬을 준비한다. 하늘나라로 떠난 아들이 알려준 나눔의 기쁨은 ‘재성이네 나눔쉼터’ 에서 오늘도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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