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대통령표창안병원

사랑을 싣고 달리는 택시봉사 대장

안병원

저게 뭐지? 아까그 손님이 놓고 내리셨나?….’
한여름 햇살이 따가웠던 오후. 서울 공릉동에 손님을 내려주고 가던 안병원 씨는 뒷자리의 서류봉투를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를 여는 순간 안씨는 말문을 잃었다.  3억 8천만 원에 달하는 수표와 현금 3천만 원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1983년 8월. 지금도 거액의 돈이지만 당시 4억여 원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안병원 씨는 곧바로 경찰서를 찾아갔다. 수소문 끝에 한 철강회사 간부가 회사자금을 놓고 간 것이 밝혀졌고, 회사에서는 안씨에게 사례금으로 천만 원이란 돈을 주었다.
당시 시가로 집 한 채는 너끈히 살 수 있었던 거액의 사례금을 들고 안씨는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심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그 기억들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열세 살에 고향을 떠나 구두닦이와 벽돌공 생활을 전전하다 화물운전사가 된 후 큰 사고를 당해 생사를 헤매던 때, 가난한 안병원 씨가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를 대신 내주었던 건 안 씨의 담당 의사였다. 그의 도움으로 안씨는 몸과 마음을 치료받고 생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내가 그분께 받았던 것을 조금이라도 돌려줘야지. 이 돈이면 힘든 누군가를 돕는 값진 밑천이 될 수 있을 거야.”
안병원 씨는 사례금을 사회에 기부하였다. 이후 안병원씨는 그와 뜻을 같이 하는 택시기사 일 곱 명과 함께 1982년 7월 푸른마음봉사대를 세웠고,1989년부터는 차 안에 ‘사랑의 껌’ 이란 껌 판매대를 비치하여 승객들이 십시 일반으로 보탠 돈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시작하였다. 1989년 김아름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아이가 심장병 수술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지금까지 23년 동안 461명의 아이들이 이 단체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안병원 씨는 아직도 그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이야기한다. 한 살,흑은 예닐곱 살에 수술을 받은 아이들이 이제 는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도 안씨를 잊지 않고 연락을 해오기 때문이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고 숨쉬기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건강해져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껌 판매만이 아니라 동냥이라도 해서 수술기금을 마련 하고 싶은 심정이 었어요. 심장병은 돈 만 있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이거든요.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저 혼자서는 못했을 일이예요. 1,300명 에 이르는 많은 봉사대원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함께 손잡고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는 생색만 냈을 뿐이죠. 하하하”
지금이야 심장병 치료비가 많이 내려갔지만 초기에는 제한된 모금액으로 천만 원이 넘는 수술비를 연이어 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수술이 급한 아이들을 지켜보다 애간장이 타들어가던 안씨는 수술비를 외상으로 해주면 꼭 갚을 테니 제발 수술할 수 있게 해달라며 병원장 앞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그때 외상(?)으로 수술을 시행해준 경기 부천의 세종병원,노래를 통해 모금한 돈을 기 탁해주던 가수 ‘수와 진’ , 1년 내내 폐지와 고철을 모아 판 돈을 보내주는 교회 등 주변의 모든 사 람들이 안씨에겐 잊을 수 없는 조력자들이다. 특히 안씨의 아내는 더할 수 없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형편이 어려운데다 보호자조차 없는 아이들이 수술을 마치면,아내는 아이들의 기력이 회복 될 때까지 몇 달 동안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돌봐주었던 것이다.
요즘엔 도움의 대상을 청각장애인으로 확대해 달팽이관 수술을 지원하는가 하면 독거 어르신들을 택시에 모시고 나들이 가는 무의탁노인 무료관광도 함께 하고 있다는 안병원 씨. 3평 남짓한 봉사대 사무실에서 20년 넘는 시간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해 온 그는 오늘도 작은 택시 안에 사랑 의 껌과 이웃 사랑을 싣고 따뜻한 세상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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