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민포장정상모

“가난할수록 쌀이 떨어지면 안됩니다 밥심이 있어야 뭐든 할 수 있죠 ”

정상모

“할매요, 지난번에 쌀 가져간 거 다 묵었을 낀데…. 쌀 있능교?”
동네를 돌고 있던 정상모 씨는 길 건너집 할머니를 만나자 쌀독 안부부터 묻는다. 할머니는 ‘고마워,너무 고마워’ 하며 정상모 씨 손을 잡는다. 오늘 저녁 할머니는 또 한 포대의 쌀을 받아 손주와 찰진 햇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60년 전 정상모 씨 역시 밥을 굶기가 일쑤였다. 나물죽과 나무껍질 벗겨 먹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 곡기가 그리워 아버지 점심으로 둔 밥을 몰래 훔쳐 먹다 어머니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야속하고 서러웠던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어릴 적 정상모 씨에게는 밥이 금이었고,쌀밥을 된장국에 말아 배터지도록 먹어보는 게 일생 소원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운전사 조수로 일하면서 그는 돈만 벌면 논을 사들였다. 그 논에서 그의 허기를 달래줄 쌀이 나오기에, 돈이 모이면 논을 사러 들로 달려갔던 것이다.
쌀을 목숨처럼 여긴 정상모 씨에게 서서히 인생의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는 논값은 거름값이고, 쌀값은 금값이던 세상이었는데,세월이 흐르면서 논값은 금값이고 쌀값은 거름값이 되는 희한 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틈틈이 사놓은 논 덕분에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된 정상모 씨,그러나 그는 홀로 넉넉한 삶을 살고자 하지 않았다. 72년부터 논에서 수확한 쌀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다.
“쌀이 집에 있어야 일단 든든하잖아요. 밥 먹고 배가 든든해야 뭐든 할 의욕이 나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일수록 쌀 떨어지면 큰일나죠.”
40여년 전부터 쌀을 나눠주는 일을 계속해온 것은 이런 그의 철학 때문이었다. 밥 한끼를 제대로 먹는 게 소원이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남의 집 끼니에 대한 정씨의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없었다. 그래서 그는 1991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독거노인,소년소녀가장,복지 시설 등에 쌀과 성금을 기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무려 3억 원의 쌀을 기부했으니 그가 준 쌀로 도움을 받은 이웃의 수는 상당하다.
공식적인 기부 외에도 정상모 씨의 쌀 창고는 늘 열려 있다. 손수레로 쌀을 조심스럽게 실어내 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더 못 주어서 안달이다. 양산에서 ‘정상모를 모르면 간첩’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쌀천사’ 로 유명해진 그다.
그의 나눔은 물질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있는 마을에 위치한 서창초등학교 앞에 서는 유난히 어린이 교통사고가 잦았다. 불행한 사고를 그저 남의 일 구경하듯 둘 수 없어,그는 1983년부터 1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둥하교 길의 교통 지킴이가 되어 주고있다. 마을 아이들을 내 자식,내 손주라 생각하고 지켜준 정상모 씨의 정성…. 그는 배고픈 이들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든든한 파수꾼이다.
정상모 씨는 한때 건강 악화로 생사의 고비를 4번이나 넘어야 했다. 그의 건강을 우려한 주변 사람들은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그만두라 만류하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신이 불우이웃을 더 많이 도우라고 죽을 목숨 살려주셨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라며 더 많은 쌀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고,더 많은 이들의 진자리 마른자리를 살피러 다니고 있다.
한결같이 시장에서 산 값싼 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니는 정상모 씨는 오늘도 낡은 구두의 흙을 털어내며 대문을 나와 중얼거린다.
“어디 쌀 떨어져가는 집 없나? 아이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〇 〇 할배집에 한 번 가 봐야겠구먼…” 만년 농사꾼 정상모 씨 곁에서 선한 냄새가 바람 끝에 묻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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