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민훈장 동백장故황금자

“돈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은 도와야지…”

故황금자

“그 시절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어. 나야 다 산 인생인데 돈 없어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을 도와야지…. 이제 마음이 후련해.”
편치 않은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국민추천포상 시상에 참가했던 황금자 씨,그녀가 힘겹게 입 을 열며 한 말이다. 한평생을 기구하게 살아온 할머니….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지난 시절을 되돌아본다.
1924년 함경도 출생의 황금자 씨는 13세 때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흥남 유리공장에서 일했다.  3년 뒤 다시 간도로 끌려간 후로는 일본군 위안부로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다. 광복이 되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끔찍했던 지난 시절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다.  식모살이를 전전하다 폐지를 주우며 인근 복지관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냉골에 두꺼운 점퍼를 입고 버텨냈던 세월…. 절약이 몸에 배인 할머니는 그렇게 조금씩 재산을 모았다.
외로운 생활에 지쳐 길에서 떠돌던 아이를 데려와 양녀로 키웠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가슴으로 기른 딸이 하늘나라로 떠나 버린 것이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모질고 혹독한 세상이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간도에서의 기억 때문에 한때 밤마다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다.  제복을 입은 고등학생을 보면 일본 순사라며 ‘잡아가라’ 소리치기도 했다.  몸서리치는 기억…. 세상이 그녀를 버렸다 생각했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모진 세상을 욕하고 한 많은 자신의 인생을 절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2003년 할머니는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던 한 사회복지사를 만나면서 따뜻한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던 할머니는 매일같이 동사무소를 찾아가 한 맺힌 사연을 그에게 펼쳐 놓으면서 꽁꽁 얼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갔다.
할머니는 자신을 정성스레 돌봐준 사회복지사를 믿고 의지하게 되면서 자신이 모아온 재산까지 물려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는 소중히 모은 돈, 더 큰 일에 쓰자고 할머니를 설득했다. 위안부 생활안전지원금, 기초수급자 생계비 등 나라에서 받은 돈은 모두 저축하고, 폐지 줍기나 공공근로로 번 돈으로 생활비를 해결하며 어렵게 모은 귀한 돈 1억.  할머니는 이 돈을 세 차례에 나누어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에 장학금으로 모두 쾌척했다. 고통과 인내가 낳은 할머니의 전 재산이었다.
강서구에서는 이러한 황금자 할머니의 기부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청 로비에 부조를 세우고,직원과 구민이 월 1만원씩 기부하는 장학금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대가 낳은 비극을 견디며 평생 어렵게 모은 돈을 기부한 할머니의 고귀한 정신이 또다른 기부운동을 탄생시킨 것이다.
87세의 황금자 할머니는 지금도 등촌동 한 임대아파트에 외롭고 병든 몸을 의지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자신이 임종하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임대보증금까지 남겨진 재산 모두를 장학금으로 기탁해달라는 유언장을 작성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나는 나라를 잃은 세상에 태어나 힘들게 살았지만, 우리 젊은 학생들만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황금자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다. 그녀의 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지만, 그녀의 뜻과 정신 은 길이 남아 어려운 학생들에게 희망의 화수분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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