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故이태석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의 사랑

故이태석

2010년 1월 14일. 한 사제가 선종했다.
죽는 순간까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며 떠난 신부,이태석. 그의 영혼은 죽는 순간 아프리카 수단 톤즈로 날아가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톤즈 주민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으리라.
“당신들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참 많은 것을 얻고,배우고,행복했노라고…’’
故이태석 신부는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착한 심성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태석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의대를 졸업했다. 그는 가족들과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요,자랑이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그는 가족들의 눈물 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자 홀연히 그 힘들고  어렵다는 해외 봉사에 나섰다.
오랜 내전으로 고통 받는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 남수단 톤즈. 그는 신학교 재학 중 다녀온 톤즈에서 가난으로 인한 극한의 처참함과 죽음의 공포를 보며 해외 봉사에 대한 결심을 이미 굳힌 터였다.
“처음 왔을 때 느낌은 정말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했어요. 세상에 이보다 가난한 나라가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곳에서 뭔가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그 순간 여기 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톤즈 사람들은 오랜 전쟁의 고통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 였고,지독한 가난 과 만연한 질병은 그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천지. 이태석 신부는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맨손으로 일구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손수 벽돌을 구워 병원을 세웠다. 그는 하루 3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그들 중에는사 흘 밤낮을 걸어 이태석 신부를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오후 두세시가 되면 병원에 아이들을 불러 악기를 가르쳐 주었고,흥겨워진 아이들은 제멋에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를 계기로 남수단 최초 35인조 브라스 밴드가 탄생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800여 명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집이 없는 전쟁 고아와 아이들을 위해 기숙사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배척하는 한센인들을 위해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정성껏 치료했고,일주일에 한번씩은 오지 마을로 진료를 나섰다.
“아이들에게 공부와 음악을 가르치는 과정이 행복했던 건 아이들이 변화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노 가득했던 톤즈 아이들 눈망울이 조금씩 희망으로 달라져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까지 위협했던 거친 아이들이 어느새 공손한 학생으로 돌아와 배움을 갈망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태석 신부가 작곡한 ‘꼼보니’ 라는 시민 가요가 마치 그를 칭송하듯 울려 퍼진다.  작은 병에만 걸려도 생명까지 위협받던 아이들은 그가 처방한 약을 먹고  빠르게 회복했고, 혼자 놀다 지뢰를 밟아 죽어가던 아이들이 배움의 즐거움에 매혹되었다. 다친 마음을 회복한 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나라,한국의 가요와 노래를 즐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랑과 헌신으로 톤즈를 서서히 변화시킨 이태석 신부. 그는 그곳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의 치유사요,의사로,교사이자 예술가로,톤즈의 ‘희망’ 그 자체가 되었다.
하지만 8년간 톤즈를 위해 헌신하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던 이태석 신부는 대장암 판정을 받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갔다.
“톤즈를 세상 가장 낮은 곳이라고들 하죠.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뒹굴며 노래 하던 세월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제 생을 그곳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입니다:’
4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이태석 신부. 그는 숭고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말해주었다. 그의 삶은 톤즈에서,그리고 한국에서, 깊은 영혼의 울림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