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무총리표창김재문

나눔으로 이웃사랑 수확하는 ‘나눔 천사 농부’

김재문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의 시골마을에서 7대째 농사를 지어온 김재문 씨는 마을에서 구두쇠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 나눔을 펼쳐 더 유명해졌다. 수십 년 간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럽게 모은 돈 1억 원을 불우이웃돕기와 장학금 등으로 아낌없이 내놓은 것. 그의 이름 앞에는 이제 구두쇠라는 별명 대신 기부 천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자신에겐 인색하고, 이웃에겐 너그러운 기부 천사

김재문 씨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안방에 있는 장롱도 40년 넘게 사용하다가 얼마 전에야 바꿨을 만큼 돈 쓰는 데는 인색하다. 하지만 김 씨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지난 2002년 경북 영양군에 수해가 났을 때 그는 복구 활동에 이틀을 꼬박 동참했고, 2007년 태안 기름 유출사고 때는 사흘간 기름제거 작업에 매달렸다. 이밖에 연평도 포격 사건, 호남지역 폭설, 제주마을 수해,우면산 홍수 등 재해가 일어난 곳에는 빠짐없이 찾아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재난이니까 내 일 같이 쫓아가는 거죠.” 재해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한 뒤에 그는 성금을 기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재문 씨는 20여 년 동안 이장 일을 하며 받는 20만 원의 수당과 51만8천 원의 국민연금을 매달 ‘경기도공동모금회’에 납부해왔다. 이렇게 기부한 돈이 모두 1억 원이 넘는다.
“군대에 있을 때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제대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제겐 무척 좋은 경험이었어요. 인내력도 많이 길렀고요. 그것이 사회생활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지요.” 김재문 씨는 육군 5사단 예하 전방부대에서 복무하고 1967년에 하사로 전역했다. 제대한 뒤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으며 기반을 잡아 나갔다. 그러던 중 군 생활하면서 배고팠던 기억이 나 추수가 끝난 뒤면 떡과 엿, 과일 등을 챙겨 인근 부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부대에서 나오는 급식만으로는 한창 먹을 나이인 군인들에게 부족합니다. 그래서 떡을 해다 주니 무척 고마워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한 군 위문을 1년에 서 너 차례씩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또 형편이 어려운 장병들에게 매년 300만 원씩의 위문금을 전달해왔다. 농기구 외에 자가용을 산 적 없는 그는 지금도 몇 상자나 되는 음식을 싸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군인들을 찾아간다. 그 마음에 감동한 장병들은 그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다. 수백 통이 넘는 편지를 김 씨는 고이 간직했다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열어본다. 그러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다고 한다.

나눔으로 이웃사랑을 키우고 수확하는 농부

“제가 가난을 겪어봤으니 딱한 사람들의 사정을 아는 거죠. 그러다보니 돈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바로 기부하고, 도와줘야 직성이 풀려요.” 그렇게 선행을 베풀어온 김재문 씨지만, 11년 전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농사일을 끝내고 경운기를 몰고 가다 졸음운전을 하는 트럭과 충돌해 큰 부상을 입었다. “사고를 당하고는 기억이 없었어요. 눈을 떠보니 병원이더라고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수술을 했어요. 처음엔 연골만 넣었는데, 그 자리에 골수염이 생겨 뼈를 고정시켜주는 수술을 또 했죠. 그렇게 꼬박 열 달을 입원해 있었어요.” 두 번에 걸친 수술 이후 김 씨는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구부리지 못한다. 몸이 그렇게 불편한데도 그는 각종 재해현장을 지금도 꾸준히 찾아다닌다.
“빈부격차가 심하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어려운 사람이 자포자기할 수 있어요. 골고루 잘 살아서 나라가 평안해 져야죠. 나라가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김재문 씨는 자신이 죽은 뒤에는 신체를 기증하기로 서약 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베푸는 선행이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단다. “어머니가 시집오신 지 8개월 만에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되셨어요. 아버지가 안 계신 20개월 동안 어머니 혼자서 농사지으면서 시부모님을 모셨어요. 아버지가 돌아오신 뒤 5남매를 낳아 다 키우셨죠.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환갑 때 중풍에 걸리셨고, 20년 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가 모든 수발을 다 해드렸어요. 그래서 한 번도 집밖에 나가보시질 못했어요. 그러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
셨죠.”

바쁜 농사일로 고되지만 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김재문 씨, “쓰고 싶은 것 다 쓰면 언제 봉사하나요?” 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는 농기구를 챙겨들고 논으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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