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대통령표창김형중

“못 배운 사람들의 한, 누군가는 풀어줘야지요”

김형중

벌써 50년이 넘었다. ‘인향초중고 야간학교’ 김형중 교장은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김 교장은 그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학교 문을 닫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교육이 주는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결코 교문을 닫을 수 없었다. 결국 김 교장의 노력은 평생 동안 이어졌고 그 덕에 이곳에서 학업을 마친 졸업생이 어느덧 2천명이 넘는다. 이 중 1,800명 이상이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100여명은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 결과, 그는 주변 사람들과 교육 관계자들로부터 인천 야학의 기반을 만든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빵보다 배움이 더 중요

“1960년대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당시 학익산에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 아이들에게 떡과 응원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니 그 애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교육이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해 봉사정신을 배운 김형중 씨는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야간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김 교장은 야학 운영과 자신의 학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학업을 포기했다. 그의 부모는 금지옥엽 3대독자인 김 씨의 선택을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그의 열정에 두 손을 들었다. “어머니께서 많이 지원해주셨어요. 10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지금도 가끔씩 꿈에 나타나세요. 아직도 아들을 신경 쓰고 계시는 것 같아요.” 돈을 버는 일도 아니었고,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니었다. 월세나 운영비도 충당하지 못해 쩔쩔 맨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지만 김 교장은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1962년 도원향초중학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인향초중고야간학교는 지나온 역사만큼 힘든 고비도 많았다. 집세 때문에 10여 차례 학교를 옮겨야 했다. 야학 들이기를 꺼려 건물이 비었는데도 세를 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불가피하게 휴교를 해야 했다. 어렵게 지은 학교건물이 무너져 내려 천막을 치고 수업을 하기도 했다. 공부할 공간을 구하려고 시청과 구청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시의 재정 상태로는 지원이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다. 당시 천막에서 수업을 하며 사용하던 호야등이 있는데, ‘그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 김 교장은 이사 갈 때마다 그 호야등을 제일 먼저 챙긴다.
사실 김형중 씨는 학교 건물이 완공되면 전직 교장선생님을 초빙해 정식 학교인가를 받고 안정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만든 다음 자신은 물러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오기로 한 후임 교장이 포기를 해버렸다. 기운을 잃고 멍하니 있는 김 교장에게 한 학생이 “선생님도 가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순간 마음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그 아이의 말이 저를 평생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 같아요.”

800~900명 교사들의 헌신이 오늘의 학교 마련

구두닦이를 하며 야학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결혼을 하고, 이제는 부모가 되어 찾아온다. 더러는 야학 후원자가 되기도 한다. 그는 학생들을 졸업시키며 항상 강조하는두 가지 말이 있다. 그것은 ‘첫째, 졸업하고 학교를 도울 생각하지 말고, 삶의 현장에서 이웃을 도와라. 둘째, 너희 자식만큼은 야간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졸업한 학생들이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김형중 교장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배어있다.
“배울 때 힘든 것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한은 평생 갑니다. 그리고 교사는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의 심부름꾼입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교사들이 800~900명쯤 됩니다.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향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김 교장은 손수 김치찌개를 끓여 교사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김형중 교장은 야학에 전념하느라 결혼도 늦게 했다. 그의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아내는 “생계는 내가 책임질 테니 당신은 야학에 전념하라.”며 지금까지 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마흔 살 늦둥이로 낳은 외동딸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3년간 야학 봉사에 소매를 걷어 올리기도 했다.
“전국에 160개의 야간학교가 있는데, 대부분이 남의 건물을 빌려 열악한 환경에서 수업을 해요. 저희 학교도 건물 벽이 얇고 창문도 한 겹이라 겨울엔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비가 새고, 옆방의 수업소리가 다 들립니다. 그래도 배우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에 이곳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들의 못 배운 한을 누군가는 풀어 줘야 하잖아요.”
해외유학까지 가는 사람들도 흔한 시대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학교는 아직도 절실하게 가고 싶은 희망의 장소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김형중 교장은 오늘도 조용히 인향 야학의 불을 켠다. 불을 켜자 노란 전등 불빛이 흘러나와 김 교장의 주변을 따뜻하게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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