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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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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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대통령표창김택구

파도에 맞선 당신의 희생정신 늘 잊지 않겠습니다

김택구

2011년 9월 13일, 김택구 씨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메추리섬 선착장 근처에서 가족들과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 날은 파도가 높았고, 선착장 위에는 남자 초등학생과 여중생이 함께 놀고 있었다. 낚시를 하던 김택구 씨가 선착장으로 시선을 돌리니 조금 전까지 그곳에서 놀던 아이 둘이 보이지 않았다. 사태를 짐작한 아버지 김택구 씨와 아들 김영수 씨는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바다에 뛰어들었다. 먼저 여자 아이를 무사히 구해냈다. 하지만 남자 아이를 구하러 다시 바다에 뛰어든 김택구 씨는 영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생면부지의 아이 구하다 목숨 잃어

“나는 남은 아이를 구할 테니까 먼저 나가라!” 김택구 씨가 아들에게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아들 김영수 씨는 여중생과 함께 선착장에 올라온 뒤 실신했다. 김택구 씨는 남은 아이에게 접근해 한 팔로 아이의 목을 껴안고 다른 팔로는 수영을 하면서 선착장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하지만 거친 파도 탓에 김 씨는 선착장에 닿지 못하고 번번이 바다로 또 다시 쓸려 갔다.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탈진증세까지 찾아왔다. 파도와 사투를 벌이던 김 씨는 끝내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가 아이를 포기하고 혼자 헤엄쳐 나왔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끝까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어요. 남편이야 눈을 감고도 헤엄칠 만큼 수영에 능숙했으니까요. 그러다 큰 아들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중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어요.” 아내 이춘광 씨는 무슨 정신으로 현장에 달려갔는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험한 파도 속에서는 절대시신을 못 찾는다고 했지만 그들은 4시간 만에 발견되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김영수 씨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엄청난 일이라 그는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낚시를 많이 다녔어요. 그 날도 아버지가 낚시를 가자고 했는데 저는 별로 내키질 않더라고요. 어느 틈엔가 밀짚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챙겨 나오신 아버지를 보고는 마지못해 따라나섰어요.”
김영수 씨는 용접 일을 하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 금속재료와 열처리 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 중이다. 그는 압연 부문 명장이 되기 위해 이 분야의 회사 문을 두드리고 있다. 취업하고 안정이 되면 김영수 씨는 보육원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식들을 믿고 지원해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처럼요. 동생이랑 싸워서 딱 한 번 꾸중들은 것 외에는 혼난 적이 없어요. 말씀도 별로 없고 무뚝뚝하셨지만 늘 저를 믿고 지켜봐주셨죠.”
둘째 아들 김영근 씨는 태권도 국가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현재 군복무 중인 그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이후 직업군인의 길을 택할 생각이다. 그는 바쁜 군 복무 중에도 틈을 내어 이틀에 한 번씩은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위로하고 챙긴다.

살신성인의 용기와 헌신, 늘 잊지 않을 것

고 김택구 씨와 결혼해 시부모님을 모시며 아들 둘을 훌륭히 키워낸 아내 이춘광 씨는 지난 6년 간 중풍으로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정성껏 보살펴왔다. 아예 거동을 못하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정성이 닿았는지 서서히 회복되어 한 발씩 걸어 다녔고, 나중에는 한 손으로 빨래를 갤 정도로 호전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들과 함께 저 세상에 있다. 이춘광 씨의 건강도 좋지 않다. 5년 전 뇌종양 수술을 받은 이 씨는 당뇨병까지 겹친 상태. 하지만 이 씨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식당 일을 그만 둘 수가 없다. 고 김택구 씨는 아내에게 살가운 남편은 아니었다. 술 한 잔을 걸치면 그때서야 “부모님께 잘 해줘서 고맙다”고 한 마디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씨는 그런 남편의 마음을 잘 알기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작년에 낚시 가는 날, 남편이 배가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고모네 식구들하고 다 같이 가기로 약속한 거라 말리질 못했어요. 저는 일을 해야 해서 함께 가지 못했는데 내내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오후 3시쯤에 전화 통화를 했는데 칼국수를 먹고 있다고 했어요. 그게 마지막 통화였어요.” 살아있을 때 더 잘해줄 걸, 말 한마디라도 더 따뜻하게 해 줄 걸…. 이 씨에게는 후회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남편이 늘 옆에 있어 소중함을 잘 몰랐는데, 그 사람이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가 표가 확 나더라고요. 남은 바람이 있다면 올해 일흔여섯 되신 시아버님 잘 모시고, 아들들이 결혼해서 잘 사는 걸 보는 거죠. 남편 생각이 나면 순간적으로 울적했다가도 아들 얼굴 보면서 힘을 내고 이겨내요.”
며칠 전, 첫 번째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아버지가 고이 잠든 대전 현충원을 찾았다. 살신성인의 용기와 행동으로 끝까지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그의 고결한 정신을 유족들은 다시 한 번 기렸다. 그렇게 세 모자는 남은 생을 고 김택구 씨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겠노라는 다짐을 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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