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대통령표창김정하

빈곤국 어린이와 가난한 이웃을 도운 ‘구두닦이 목사님’

김정하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인생 최대의 의문이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꿈은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구두를 닦아 해외의 불우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또 작은 교회를 열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을 전하고 있다. 그는 근육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불치병인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 손가락 근육이 마비된 그는 손가락 마디 하나를 간신히 움직여 설교문을 한 글자씩 써내려간다. 그 설교문의 내용은 ‘지금 당장 나누고 사랑하라’이다.

구두 닦아 해외 불우아동 돕는 목사님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김정하 목사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강원도 삼척에 있는 조부모의 손에서 외롭게 자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무작정 상경해 공장 근로자, 선원, 노점상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주경야독으로 방송통신대까지 졸업했다. 그래도 그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교통사고·감전·폐결핵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며 잠시 안정을 찾는가 싶었는데, 경제 불황의 여파로 그만 파산해버렸다. 절망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 전기도 전화도 없고, 난방도 되지 않는 산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자신의 길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신학대학에 진학해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된 그는 경기도 성남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열었다.
“그 당시 상황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가족의 사랑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제 자신이 조손 가정에서 외롭게 자란 사람이라 외로운 아이들을 거두고 싶었습니다.”
버려진 아이를 사랑으로 거두고 싶다는 소망대로 김 목사는 세 명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다. 아이 세 명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입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정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를 맞았다. 그래서 그는 굶주리는 해외 어린이 후원으로 눈을 돌렸다. 처음에는 어린이후원단체 ‘컴패션’을 통해 아프리카 어린이 두 명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후원하는 어린이들이 하나둘 씩 늘어갔다.
교회를 연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후원금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그는 군대생활 할 때 선임병이 “워커 참 잘 닦는다”고 자신을 칭찬하던 말을 떠올렸다. 김 목사는 곧장 2만원을 투자해 ‘실내화 세 켤레, 구두약, 솔, 토시’를 장만해 구두를 닦으러 나섰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인 돈으로 아이들을 후원했다.

루게릭병에도 나눔의 열매는 무르익고

친절한 김 목사는 교회 앞에 늘 항아리를 놓아두고 있다. 그 항아리에는 쌀이 가득 들어있다.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 이곳에 와서 쌀을 퍼갈 수 있다. 교회가 상가 2층에 있다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노인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해서 1층 부동산 점포와 길 건너편 세탁소 앞에도 항아리를 두고 넉넉하게 쌀을 넣어 두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쌀 항아리에 남 몰래 쌀을 가져다 붓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퍼내도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처럼 그 항아리는 늘 쌀로 가득하다.
“모두가 어렵지만 힘든 사정을 서로가 잘 아는 거죠. 우리 가족은 없으면 안 먹고, 안 쓰며 사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베품과 나눔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 작은 항아리를 통해 사랑을 나누는 마음이 계속 퍼져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나눔을 실천하던 김 목사는 지난 2010년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즉 루게릭병이라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평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올 게 왔다. 이제 더 좋은 일이 생기겠지’라며 툭툭 털어버리던 그는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김 목사는 “언제 죽을지 모른 채 인생을 흘려보내는 것보다는 죽음을 미리 알고 알차게 사는 게 더 큰 축복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시한부 인생이고, 다만 그 시간이 조금 길고 짧은 것뿐이예요”라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기적은 없었다. 진단 1년 만에 병세는 악화되었다. 온 몸이 굳어지기 시작해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어지면서 아내최미희 씨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간호사 생활로 생계를 돕던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그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구두를 닦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나눔은 중단되지 않았다. 구두를 맡기던 단골손님들이 감동을 받아 김 목사 대신 8명의 해외 불우 아동들을 후원하고 있다. 김 목사의 아내가 다니던 병원에서도 해마다 쌀 120포를 보내주고, 또 여기저기 생각지 못한 곳에서도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

나눔과 사랑이 기적을 낳는다

“기적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가진 이들이 남을 돕지 못한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이 조금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기보다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눌 때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이제 아내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말은 최 씨를 거쳐 전달된다. 그런 식으로 많은 인터뷰를 했기에 최 씨가 그를 대신해 답변을 할만도 한데, 최미희 씨는 한 번도 자신이 넘겨짚고 대답하는 일이 없다. 김 목사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고, 제대로 말을 전했는지 다시 확인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항상 웃음으로 가득하다.
김정하 목사는 그런 아내에게 “내 유일한
‘루게릭 방언’ 통역사이자 내 몸을 돌봐주는 평생 간호사다. 그런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며 살아갑니다. 혹시라도 지금 힘든 생각으로 아픈 시간을 보내는 분이 계시다면 저를 보고 힘을 얻으셨으면 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살면 됩니다.”
이미 오래 전에 각막과 장기 및 신체까지 기증하기로 서약한 김 목사는 젊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기에 “남은 삶은 보너스 인생이지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치병에 걸렸으니 치료하느라 돈 들이고 수고할 필요가 없이, 남은 생애를 온전히 남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고 김 목사는 덧붙인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저는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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