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훈

영예의
수상자

나눔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웃의 안전을 살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입니다.

국민훈장 목련장김해영

고난을 딛고 아프리카 오지에 희망을 피어올린 ‘134cm의 작은 거인’

김해영

척추장애,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초등학교를 마치고 식모살이를 하며 시작한 가장 노릇.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라야 할 어린 나이에 김해영 씨가 겪어야 했던 쓰디쓴 고통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 나섰다. 무료직업훈련원에서 배운 편물기술을 국내외 각종 기능대회에서 1위를 휩쓸 정도로 갈고 닦았다. 또한 가족을 부양하는 동시에 틈틈이 학업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26살이 되던 해, 김 씨는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 오지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보츠와나의 낙후된 마을을 찾아 주민에게 편물기술을 가르치며 그녀는 14년이라는 세월동안 아프리카에 청춘을 바쳤다. 이제 국제사회복지사가 된 그녀는 더 낮은 세상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축복 받지 못했던 소녀 해영의 희망 찾기

김해영 씨는 2남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술김에 갓난아기였던 김 씨를 밀쳐냈고 그 충격으로 척추장애가 생겼던 것. 김씨는 키가 134cm 밖에 자라지 않는 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상처를 입었다. 역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 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 만에 우울증을 앓던 아버지가 몸이 성치 않은 어머니와 5남매를 남겨둔 채 목숨을 버렸다. 김해영 씨는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어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땐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식모살이를 하면서 평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 신문에서 무료로 직업훈련을 시켜주는 교육원 기사를 봤습니다. 꿈을 키워달라는 편지를 썼고, 입학 허락을 받았어요. 열심히 편물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땄고, 하루에 14시간 씩 일하며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했죠. 이를 악 물고 노력한 끝에 중등, 고등 검정고시까지 합격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결실이 이어졌다. 김 씨는 전국 장애인기능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한데 이어 1985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 기계편물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스물여덟 해영 씨의 희망 키우기

부단한 노력을 통해 김해영 씨는 최고의 기술자로 자리 잡게 되었고, 동생들이 장성하면서 그간 도맡아왔던 가족부양의 부담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해영 씨는 섬유학과나 의상학과에 진학해 니트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두 번의 대입시도는 모두 불합격으로 끝나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좌절을겪은 김해영 씨에게 삶을 바꾸는 변화가 불현듯 찾아왔다. 어느 날 신문을 읽던 김 씨는 광고 한 줄에 눈길이 멎었다. 아주 작은 글씨였지만 그녀의 눈에 유난히 크게 보인 문구는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함께 일할 양재, 편물 자원봉사자 모집’이라는 광고였다. 한 선교단체에서 올린 짧은 광고 한 줄이 해영 씨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1990년, 김해영 씨가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내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면 어떨까?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 애초에 희망 따위는 꿈꿀 수 없는 아이들이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일지 모른다. 성공을 쫓는 삶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자.’
아무런 준비도 없었지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해 김해영 씨는 최고 기술자라는 명성과 경력을 뒤로한 채, 머나먼 땅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의 오지, 굿호프의 희망나누기

“전기도, 전화도 없는 땅, 도로포장조차 안 된 그곳은 꼭 1950년대의 우리나라 모습이었어요. 인구는 15,000 명 정도. 아프리카 남쪽의 황량한 보츠와나. 그 사막 끝자락에 세워진 작은 마을 ‘굿호프(Good Hope)는 희망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척박한 땅 그 자체였죠.”
현지에 도착한 해영 씨는 언어 연수나 현지 적응 단계도 없이, 곧장 주민들에게 편물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장애인의 몸으로 오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함께 학교 건물을 지었다. 밤에는 다음날 가르칠 수업 준비를 했다. 영어, 한국어, 보츠와나 현지어에 손짓발짓까지 쓰며 의사소통을 했다.
“학생들이 가끔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듣다보면 제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의 처지가 이해가 되고 그곳의 상황이 하나 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와있나? 생각해보니 그건 바로 ‘교육’ 덕분이었어요. 그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 줄 게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가난하고 척박하지만, ‘꿈을 꾸는 땅’ 굿호프에서 김해영 씨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김 씨는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로부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찬사를 수없이 들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진심이 어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습니다. 장애인이라서 받는 불공평한 대우도 없었어요.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으니까요.”

꺼지지 않는 희망의 촛불처럼

1년 계약으로 봉사를 시작했던 김해영 씨는 굿호프에서 계약기간을 훌쩍 넘긴 14년간 편물기술을 가르쳤다. “기술학교가 2년 과정인데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그만두고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년 더 연장 했는데, 그 다음해에 새로운 학생이 또 입학하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 4년 째 되던 해엔 폐교 위기에 처해 교사들이 모두 떠났고 저 혼자 남아 큰 책임감을 느꼈지요.”
배움에 목말라하는 학생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그녀는 학교 살림을 꾸려가는 교장까지 맡아 아이들을 계속 가르쳤다. 이후 정상화된 이 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만 29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졸업생 대부분이 취업을 했고, 그 중에는 공무원이나 교사가 된 사람들도 있다. 조건 없는 사랑과 열정으로 헌신하는 그녀의 봉사정신을 높이 평가해 보츠와나 정부에서는 그녀를 에이즈 예방위원회 부의장, 장애인 재활협의회 의장에 임명하기도 했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머나먼 아프리카 오지에서 희망을 전하는 봉사자로 당당히 선 김해영 씨. 하지만 그녀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굿호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공부해 전문 봉사자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한 것. 기왕 할 바엔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났다. 정규 대학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지만 굿호프에서 14년간의 봉사로 잔뼈가 굵은 김 씨는 자신이 있었다. 만만치 않은 학비와 생활비가 걱정이었지만 굳은 의지와 긍정적인 자세를 지닌 김 씨 앞에서 돈 문제는 해결해 나갈 길이 생기곤 했다. 주변 독지가들의 도움도 컸다. 결국 김 씨는 나약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게 됐고, 내친김에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컬럼비아대학교 국제사회복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이제 국제사회복지사가 된 김해영 씨는 자신의 사회봉사의 무대를 세계로 넓혔다. 지난 8월 밀알복지재단의 희망사업본부장으로 취임한 김해영 씨는 2년 동안 ‘SBS 아프리카 희망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각지에 유치원에서 직업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의 상황에 맞는 다양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필요합니다. 질병과 가난, 전쟁과 기아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을 사회복지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손을 잡고 같이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말 값진 도움은 희망을 나누는 것입니다.”
장애와 가난을 긍정과 노력으로 이겨내고, 스스로 ‘희망의 횃불’이 된, 키 134cm의 작은 여성 김해영 씨. 그녀가 밝힌 희망의 등불은 이제 크고 찬란한 ‘희망의 태양’이 되어 지구촌 곳곳의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춰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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